신영균 (조직폭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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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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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 | 1916년 6월 8일 일제강점기 조선 강원도 인제군 |
사망 | 몰년(1988년? 이후) 미상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평산 |
직업 | 씨름인, 검도인, 공수도인, 유도인, 사회 운동가, 조직폭력배, 정치 깡패 |
학력 | 보통학교 중퇴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925년~1972년 |
경력 | 대한민주청년총동맹(조사과 과장) 청년조선총동맹(총재 겸 회장) 북문파(두목) |
신영균(한국 한자: 申永均, 1916년 6월 8일~몰년(1988년? 이후) 미상)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씨름인이자 유도인 출신의,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겸 조직폭력배·정치 깡패였었고, 1942년경부터 김두한(金斗漢)의 부하로 활동했었다.
1924년경을 전후한 시점에 보통학교를 2학년 때 중퇴 후, 1925년경부터는 어언 3년 동안 조선식 씨름을 학습했고, 1928년경부터 2년 남짓 검도(劍道)를 수련한 후, 1930년경부터 어언 6년 남짓 가라테(空手)를 수련하고 있다가, 1936년경부터 어언 6년 여 동안 유도(柔道)를 학습한 그는, 1942년경부터 김두한(金斗漢)의 우미관패 부하로 활약했으며,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초반기 당시부터 이듬해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전투 승전 때까지 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申性模)의 민간 연락 요원 등으로 석달동안 사변에 첫 참전했고, 두해 후 1952년 7월 3일 때부터 1952년 9월 3일 때까지는 한국 전쟁 중반기 불모고지 전시에 당시 국방부 장관 신태영(申泰英)의 민간 연락 요원 등으로 민간 연락 요원 등으로 재차 거듭 두달동안 참전하는 등, 동일한 사변에 민간연락요원으로 두번 참전한 그는, 지난 1942년경부터 김두한(金斗漢)의 부하로 활동했으며, 훗날 1987년에 인터뷰를 한 기록이 있어, 그 아무리 적어도 1987년경 이후라던가, 아무리 적어도 1988년경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
주요 경력
[편집]- 대한민주청년총동맹 조사과장
- 청년조선총동맹 3대 회장
신영균이 등장한 작품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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